1899년 9월 18일, 한반도에 최초로 기적이 울렸다.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 제물포 구간의 경인선이 개통되며 철도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말(馬)은 위기를 느꼈다. ‘아! 우리의 시대가 이렇게 저무는 것인가?‘.

말이 철도와 자동차의 등장으로 운송수단에서 밀려날지도 모를 위기의식을 느낄 무렵. 이를 예견한 듯 흥미로운 행사 하나가 열렸다. 1899년 5월 1일 자 <독립신문>에 훈련원 광장(전 동대문운동장)에서 외국어학교 대운동회가 있었는데 나귀를 타고 달리는 경주를 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

비록 나귀를 타고 한 경주였지만 미국과 영국 등 경마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 방식대로 하던 경주였다. 그래서 이 경주를 이 땅에서 있었던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경마라고 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경마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100년이 채 안 됐지만,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한반도의 말은 ‘경마’로 그 역할을 이어받아 발 빠르게 달려왔다. 한반도의 말(馬) 관련 문화 연대기, 두 번째 순서로 우리나라에 경마가 최초로 도입되고 정착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백범 김구 선생이 경마를 사랑한 까닭은?

우리나라 경마 역사의 시작은 구한말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신문에 실린 나귀경주는 서구의 근대 경마를 모방한 수준이었다. 이후 1907년 한강 백사장에서 이루어진 기병들의 기마 경주 등으로 이어져 왔다.

이후 1922년 서울에 사단법인 조선 경마구락부가 발족하면서 최초의 경마 시행체가 등장했고, 1928년 신설동 경마장에서 본격적인 경마가 시행됐다. 이후 지방에서도 법인 경마구락부가 속속 인가되며 자생적으로 경마를 했고, 이는 근대적인 경마가 시작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광복 이후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하루 입장객이 4000명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로선 유일한 대중오락이었던 것.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은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았다. 선생이 그토록 경마장을 즐겨 찾은 사연은 따로 있었다.

백범은 조국광복을 못 보고 중국에서 타계한 모친의 유골을 1946년 정릉 뒷산에 안장했다. 이때 경마장의 기수들이 기마의장대 역할을 맡아 호송해 주었다고. 백범이 경마 자체를 즐기기도 했지만,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즐겨 찾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신설동 경마장에 경마가 있는 날엔 미 군정 사령관인 존하지 중장과 이승만 대통령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수시로 들렀고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트로피를 마련하는 레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예컨대 이승만 상, 김구 상이 즉석에서 생긴 것.

| 실속 만점, 경마장과 골프장의 이색 동거

막 태동기를 거치던 한국 경마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폐허가 되고 만다. 말과 종사자도 뿔뿔이 흩어졌다.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1951년 서울 재탈환 후 미 공군의 비행장으로 징발되었고, 부산 제2 경마장도 전쟁 발발 직후 미군에게 징발되었다.

신설동 경마장의 역사는 전쟁으로 인해 그렇게 사라졌다. 휴전 후 1954년 서울 성수동에 뚝섬경마장이 새로 개장하면서 비로소 경마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당시 말이 부족해 대부분 제주산 조랑말로 경주를 시행했다. 열악하기 그지없던 당시, 하루 입장객은 300∼7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주로는 모래와 초지가 섞여 있고 안쪽에 채소밭이 있었으며 관람대 지붕은 미국산 맥주 깡통을 이어붙인 허름한 모습이었다. 이후 1962년에 한국마사회법이 제정되면서 민간자본 도입으로 차츰 시설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뚝섬 경마장에 동거하던 시설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골프장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뚝섬 경마장의 트랙 안에 있던 채소밭에 골프장을 짓도록 지시한 결과물이다. 1968년 뚝섬 경마장에 골프장이 개장할 당시 3개 코스로 이뤄졌던 것이 9개 코스까지 확장됐다.

이곳은 가격이 저렴한 데다 도심에 인접해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명소였다. 새벽 3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다 라운드를 즐기고 출근하는 골퍼들도 많았다고. 추억과 애환이 담긴 뚝섬골프장은 2004년 서울시의 ‘서울숲’ 조성 공사로 인해 3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주판 하나로 배당률을 계산했다고? 경마장에 ‘계산의 달인’이 있었다.

80년대는 한국 경마가 중흥기를 맞이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제15회 ARC 아시아경마회의 개최를 계기로 1983년 올림픽 승마경기장 건설 주체로 지정되었고, 1984년 마권발매업무의 전산화를 이룩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마권발매업무가 전산화되기 이전, 당시 한국마사회는 배당률 계산을 위해서 주산과 암산에 뛰어난 ‘계산의 달인’들을 특채했다고 한다. 주판으로 매 경기의 배당률을 계산해 수동으로 마권을 발매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계산기로 통할만 하다. 당시에는 발매창구 앞에 늘어선 줄의 길이가 인기 경주마를 가늠하는 척도였다고.

하지만 입장 인원과 매출액이 증가하면서 수작업으로는 한계에 도달하게 됐고,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발매 전산화를 검토하기 시작해 1984년 1월 드디어 전산화가 실현됐다. 60년 동안 주판으로 집계하고 산출하던 수동업무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90년대 한국 경마의 화두는? ‘건전 경마로 즐거운 여가 생활을’

발매 전산화로 대량의 마권을 신속하게 발행할 수 있게 되고, 고객은 배당률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경마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또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서의 승마경기를 주관하면서 한국 경마의 새로운 전환을 이뤘다. 올림픽을 개최하며 올림픽 승마경기장 겸 대단위 경마장이 건설된 것.

1989년 1월, 드디어 과천의 서울경마공원이 개장하면서 36년간의 뚝섬 시대를 마감하고 현대식 시설의 경마장으로 이전했다. 1993년부터 개인마주제가 시행되면서 경기 시스템의 질적인 향상도 뒤따랐다. 이로써 한국 경마는 또 하나의 레저문화로 뿌리내리며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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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기 마련, 경마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행성 산업 확산이라는 역기능에 직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한국 경마는 오락과 레저의 기능을 뛰어넘어 공익성과 공공성을 지닌 대중적인 레저문화로 자리 잡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 21세기, 말산업에서 경제 활성화의 길을 찾다

한국 경마는 21세기에 접어들며 그야말로 변혁의 시대에 들어섰다. 말산업에서 경제 활성화의 길을 찾아 정부 차원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

국민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스포츠에 대한 욕구가 늘면서 경주마의 승부를 즐기는 차원을 넘어 직접 말을 타고 즐기는 승마문화가 발전했다. 또 한국마사회는 공익사업의 일환으로 말과 교감하는 놀이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을 활발히 진행하며 말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고무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4년부터 한국의 경마 경주 중계를 수출하기 시작해 올해 6월 경마 종주국 영국에 진출한 데 이어, 세계 최고 수준의 경마 시행국인 미국과의 경주수출 연장계약 체결에 성공한 것. 이를 통해 10개월간 94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처럼 체계적인 말산업 육성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말산업을 연대기별로 살펴보는 ‘한반도의 말, 그 역사와 미래’. 그 시리즈의 마지막 회에서 우리나라 말산업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