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각다각 말(馬) 문화유산답사기 ①]

신라 건국신화가 담긴 <삼국유사>에 보면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백마(白馬)가 등장한다.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옆에 유난히 반짝이는 빛이 나서 달려가 보니 백마가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소리에 놀란 말이 그 자리에 큰 알을 하나 두고 승천했는데,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난 것으로 기록돼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신화나 설화에는 말(馬)이 곧잘 등장한다. 예로부터 말은 힘과 역동성, 신성성을 상징하며 우리민족에게 없어선 안 될 소중한 동물이었다. 그래서일까. 마산, 마이산, 천마산, 용마산 등등 우리나라 지명중에는 말(馬)과 관련된 곳이 유난히 많다.

국토지리정보원이 동물과 관련된 지명을 조사해왔는데, 용과 관련된 지명이 1,061곳으로 가장 많았고, 말이 744곳으로 두 번째 순으로 많았다.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에 말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머무르거나 스치고 간 곳, 혹은 익숙하게 들어왔던 말과 관련된 지명. 이 땅 곳곳에서 전해지는 말과 관련된 흥미로운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다각다각 말 문화유산답사기', 그 첫 순서로 말과 관련된 지명을 소개한다.

|| 말의 형상을 닮은 지명

▪ 마이산 (전북 진안군)
봉우리가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마이산’. 말의 형상을 닮은 대표적인 산으로 봉우리 두 개가 우뚝 솟아 영락없는 말의 귀 모양이다. 남쪽 비탈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북쪽 비탈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 봄철에는 십리벚꽃길이 유명하며 산 남쪽에는 돌탑으로 유명한 탑사와 은수사가 있다. 산 서쪽 계곡가에 있는 금당사(金塘寺)는 신라 때 고찰로, 괘불탱, 목불좌상, 석탑 등의 문화재가 있다.

▪ 길마재 (전북 고창 부안면)
우리나라엔 ‘길마재’란 지명이 여럿 된다. 안장처럼 편안하게 생긴, 나지막한 산마루나 언덕을 길마재러 불렀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이고, 높은 산마루나 고개를 ‘재’라고 한다. 변산반도가 있는 전북 고창 부안면에는 ‘질마재’라는 고개가 있다. ‘질마재’는 길마재의 전라도 사투리다. ‘질마재 신화’라는 시집을 남긴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 이곳이다. 말의 안장을 닮은 질마재 고개는 옛날 소금농사를 짓는 바닷가 사람들이 부안 장터에서 소금을 곡물과 교환하기 위해 나루터를 거쳐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다. 질마재 고개에 서린 서민들의 굴곡진 애환이 시인의 눈에서 ‘신화’로 승화된 것이다.

▪ 마두동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은 말머리라는 뜻이며, 지금도 이곳 일산 마두동 주민들은 말머리라 부른다. 이곳에 있는 정발산이 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말이 머리를 길게 내밀어 한강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한다. 이 중에서 현재 일산동구청이 있고 마두동이 있는 일대가 말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 대마마을 (전북 순창)
전북 순창의 대마마을은 말 형상을 닮은 이른바 ‘말(馬)명당’으로 유명하다. 용마산 아래의 둔덕에 자리한 이 마을은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는 조선 최고의 명당. 정승이 다섯, 대제학이 일곱, 왕비가 하나, 공신이 아홉, 청백리 다섯을 배출하는 등 실제로 이 마을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이곳은 용마산과 대마마을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풍수지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대한민국 명당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 말아가리산 (경기도 용인)
경기 용인시에서 동북쪽의 길고 높은 산릉이 광주산맥인데 이곳에 유독 말과 관련된 산 이름이 많다. 백마산으로 시작해 마락산, 말아가리산, 말치고개 등인데 그 중 높은 곳 중 하나가 해발 595m의 말아가리산. 독특한 이름 때문에 호기심으로 찾는 등산객이 많다. 산 모양이 마치 말이 입을 벌린 모습과 같다하여 마구산(馬口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 실제로 말(馬)이 많았던 장소에서 유래 된 곳

▪ 말죽거리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사거리 일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덕분에 유명해진 말죽거리는 조선시대 때 제주도에서 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던 곳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또 여행자들이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인 곳이기도 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지금의 양재역 인근에 이르러 목마르고 배고픔이 심해 죽을 쑤어 바치니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신 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 마장동 (서울 성동구 마장동)
마장동은 이곳 일대에 조선 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1963년에는 종로구 숭인동에 있던 도축장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는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됐다. 하지만 1998년 도시개발로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35년간 이어온 마장동 도축장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축산물 도·소매 업소가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면서 수도권 축산물 유통의 60~70%를 담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축산물전문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역마산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에 있는 영화초등학교 뒷산을 마장산 혹은 역마산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말을 놓아 먹이던 초원이 있었기 때문인데 광복 직후까지 마방과 주막이 드문드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에 사는 행상이나 선비들이 상경할 때 이곳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역마를 먹이던 역마촌은 나라의 중대사를 전하던 파발마가 마을의 상징이었다고 전해진다.

|| 역사적 사실에 얽힌 지명

▪ 백마고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우리 민족의 상흔을 품고 있는 백마고지. 높이 395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6·25때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쟁 막바지 10일간 주인이 스물 네 번이나 바뀔 정도로 불꽃 튀는 격전장이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백마고지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야말로 황폐한 땅이 되어 버렸다. 그 처참한 몰골을 보고 ‘마치 백마가 드러누운 모습 같다’고 해서 한 미군병사가 ‘white horse hill’이라 부른 것이 유래가 됐다. 외신기자들이 수많은 조명탄의 투하와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산의 지세를 보고 붙였다는 설도 있다.

▪ 피맛골 (서울 종로)
피맛골은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골목길이다. 조선시대 종로는 궁궐이 가까워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많은 큰 길이었다. 서민들이 큰 길을 지나가다가 벼슬아치를 만나면 엎드려 절을 해야만 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서민들은 마차를 피해서 뒤편의 좁은 길로 다니게 되었다. 이 좁은 길을 따라 주점이나 국밥집 등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 하여 피맛골, 혹은 피마골이라고 불렸다. 종로의 대표적인 맛집 골목으로 전통을 이어오다 지금은 대형 빌딩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행히 건물의 일부를 골목이 통과하는 형태로 일부 보존되고 있어 피맛골의 전통은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

▪ 마현리 (강원도 철원)
일명 말고개로 말을 몰고 가던 사람들이 하도 고개가 높아 정상에서 쉬어가야 한다고 말고개라 했다. 다른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교가 군졸을 대동하고 말고개를 넘어 화천 방면으로 가던 중 천불암 앞을 지나가게 되자 말을 끌던 안내인이 “이 곳은 신성한 곳이니 말에서 내려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나 왜 장교는 이 말을 무시하고 말 위에 오른 채 지나갔다. 말이 달라붙은 듯 꼼짝하지 못하자 장교는 움직이지 않는 말에게 화를 내며 장검으로 목을 베어버렸다. 장교는 말의 피를 천불암에 뿌렸고, 결국 왜 장교는 계곡으로 떨어져 죽게 됐다. 많은 왜군들이 이곳을 지날 때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까지 가장 많이 쓰이는 말 관련 지명은 마장·마골·길마재 288곳, 마산 49곳, 천마산 24곳, 역말 19곳 등이다. 특히 전라남도에 말 관련 지명이 많이 분포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가축 관리가 편리해 말목장이 그곳에 많이 설치됐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설이나 설화 속에 등장하는 말은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함을 암시했거나 상서로운 징조였으며, 장수들과 함께 전장을 누빈 충절과 기개가 충만한 동물이었다.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유래가 있는가 하면 더러 슬픈 역사가 스며있는 곳도 있다. 드높은 기상을 품고 산천을 누비고 있는 말에 얽힌 지명, 그 사연을 들여다보니 우리가 발붙이며 살고 있는 이 땅이 새삼 신비롭게 다가온다.


출처 및 참고>
국토지리정보원
한국마사회, ‘말 관련 Brand 및 地名 활용 현황’ (2009.7)
강원도민일보_말이 말로 얽힌 말지명 ‘흥미진진’ (2014.1)
광주매일신문_[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고창 질마재길 (2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