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통한 역사를 베어버리겠다.’

민족 저항 시인 이육사(戮史). 그런데 한자를 보면 놀랍게도 ‘죽일 육(戮)’자와 ‘역사 사(史)’자다.

치욕스러운 일제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수인번호 '264'를 가슴에 아로새긴 그는, 처음에 역사를 베어버린다는 뜻으로 ‘육사’(戮史)라는 필명을 썼는데, 그 뜻이 너무 노골적이라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 따라 ‘육사’(陸史)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난에 찬 역사를 잊지 않으려한 비통한 심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다."

그는 17번의 옥살이 와중에도 40여 편의 시를 쓰고, 만주를 누비며 비밀공작원으로 항일 운동을 했다. 펜 대신 총을 들었지만, 죽음이 기다리는 감옥에서 그는 다시 펜을 들어 시를 썼다. 민족 저항시의 대표적 작품인 광야(曠野)는 그렇게 감옥에서 탄생했다.

광복절을 맞아 ‘백마(白馬)를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울분과 희망의 저항시를 남긴 이육사의 생애와 그가 은유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말(馬)에 대해 알아보자.

'광야' '청포도' 등으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많이 들었던 친숙한 시인,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1904∼1944)이다.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이다. 20세에 일본과 베이징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 활동을 했고,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음 투옥된다. 그때 나이 23세.

1년 7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며 불렸던 수인번호가 264였다.
이듬해 1930년, 26세의 나이로 첫 시(詩) ‘말(馬)’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말(馬)’은 이육사의 공식적인 첫 작품으로 당시 필명은 이활(李活)이었다.

이 시를 발표할 무렵인 1930년대는 일제의 수탈과 만행이 극에 달했음을 감안할 때, ‘말(馬)’은 억압 받는 우리 민족 혹은 시인의 내적 자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중외일보 대구기자로 임용되고, 이육사라는 필명과 함께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는 비평과 문학 활동에 전념한다.

이후 이육사는 김원봉 선생이 이끄는 의열단 활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선다.

그는 불의를 피하는 법을 몰랐다. 형제들과 의열단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광주학생운동, 대구 항일격문 배포 등에 가담했다가 5차례 투옥됐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로 독립투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당시 저명한 문인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꼭두각시가 돼 태평양 전쟁 지원을 선동하고 있었던 때였다. 내로라하는 문인들마저 변절,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학병 연설을 하던 시기였던 것.

이육사는 항일투쟁 최전선인 중국에서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충칭과 옌안을 거쳐 이동하다가 귀국 시 무기를 반입하려 하기도 했다. 1943년 가을, 모친과 맏형의 제사에 참석하려고 고국에 왔던 그는 안타깝게도 경성에서 체포된다.

부인 안일양은 동대문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만난다. 이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딸 옥비의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중국 베이징의 일본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그는 고문과 폐병이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마지막 온 힘을 쏟으며 시를 써 내려갔다.

'광야'가 바로 그중 하나다.

감옥에 갇혀 잡았던 '펜'은 그에게는 '총' 대신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유약하지 않으며 일본 군인들의 잔인한 고문에도 두 눈 부릅뜨고 호통쳤을 기개와 강력한 투사의 절규가 깃들어있다.

그러나 이육사는 광복을 맞기 한 해 전인 1944년 1월 16일 새벽, 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41세. 시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 여사는 현재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을 지키고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하는 <광야>는 이육사의 대표작이자 저항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억압된 현실을 극복하고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담겨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시 <광야>의 마지막 문단,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라는 구절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누굴까.

우리 민족에게 광복을 가져다줄 인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일부에서는 구체적인 인물로 허형식(1909~1942년) 장군이라는 주장이 있다.

허형식은 이육사 어머니의 사촌 동생으로 육사보다 5살 어렸지만, 한·중 통합 군사조직인 동북 항일연군의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일제 토벌대를 상대로 무수한 유격전을 벌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허형식은 만주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1942년 33세 나이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시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처럼 생전 허형식 장군은 늘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1930년대 만주에서 허형식 장군과 이육사가 만난 사실이 있는데, 이때 백마를 타고 나타난 모습을 묘사한 것이 '광야'라는 설이 있다.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시 <청포도>는 덜 익어 푸른색을 띠는 풋포도다. 이러한 풋포도는 독립을 기다리는 조선으로 비유됐다.

이육사는 평소 지인에게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일본은 끝장난다."고 말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육사는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라고 했다. 죽음을 초월해 일제에 저항하며 조국의 광복과 초인에 대한 열망을 시로써 형상화한 그에게 시는 보다 진정한 방식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출처 : 한국마사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