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각다각 말(馬) 문화유산답사기]

예로부터 말(馬)은 사람과 친숙하게 지내온 동물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나 설화에 신령스러운 동물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대표적으로는 중세 유럽의 전설에 나오는 유니콘이 있다.

유니콘은 뿔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무적의 힘을 과시하지만, 여성의 매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추며 무릎을 베고 잠들어버리는 버릇이 있어서 유니콘을 사로잡을 때는 여인을 미끼로 삼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는 양어깨에 날개가 있어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천마(天馬)다.

천마(天馬)의 신화는 우리나라에도 넓게 분포돼 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금와왕, 혁거세, 주몽 등 나라의 시조가 탄생할 때에는 어김없이 신령스러운 천마 혹은 용마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곳곳의 말(馬)과 관련된 흥미로운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다각다각 말 문화유산답사기’, 그 다섯 번째 순서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말에 얽힌 신비롭고 재미있는 전설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엔 천마산, 천마봉 등 날개가 달린 말이 살았다는 천마(天馬)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있다. 그중 고창 선운산의 천마봉이 대표적이다. 선운산은 해발 336m로 그리 높지 않지만 기암괴석과 우거진 숲이 절경을 이룬다. 우뚝 솟은 여러 봉우리 중 하늘을 날며 장엄한 자태를 뽐내는 말 형상의 바위가 바로 천마봉이다.

천마봉은 선운산 청룡봉에서 낙조대를 지나며 위치해 있는데, 우측으로 오르는 층층 계단에 마치 천마봉에서 말이 뛰어 내렸을 법한 말발굽 자국이 보인다. 이 말발굽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존재한다. 이 바위에 있던 장수가 서해안으로 침투해 만월대까지 진격한 외적을 발견하고 천마를 타고 날아서 내린 말발굽 자국이라는 설과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천마를 타고 건너 뛸 때 생긴 말발자국이라는 설이다.

또 하나는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곳 선운사에 와서 수도했는데, 이시기 중애공주를 찾아다니던 진흥왕의 말발굽 자국이라는 설이다.

자연의 일부인 바위에 깃든 전설을 접하니 그 감흥이 남다르다. 선운산 천마봉에 전해지는 다양한 전설을 직접 찾아가서 느껴보고 싶다면 지금이 제격이다. 이곳 숲 곳곳에 동백만큼이나 붉은 빛을 발산하는 꽃무릇이 절정이기 때문.

꽃은 잎을,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는 이 꽃무릇에도 여러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래전, 선운사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설도 있고,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여인에 반한 젊은 스님이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찰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꽃무릇 뿌리에 있는 독성 때문. 사찰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독성이 강한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꼬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가 어쨌든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의 전설이 더해지니 더 애틋하고 유혹적인 것이 사실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이야기는 용마산과 아기장수 전설. 해발 348m의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 대공원 후문까지 이어진다. 이 바위능선이 말안장을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말마봉 또는 말마산이라 불렸다.

용마는 ‘힘이 세고 뛰어나게 훌륭한 말(馬)’을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남서쪽에 있던 북바위산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 산에 살던 용마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포효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현재 용마산 기슭에 용마폭포공원이라는 인공 폭포가 조성돼 있어 지역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용마와 아기장수와 관련된 전설은 전국 100여 곳에 산재해 있다. 그 내용은 평민이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어 날아다니고 힘이 센 장수였다는 것. 그러자 부모가 이 아이가 커서 역적이 돼 집안을 망칠까 두려워 돌로 눌러 죽였더니 용마가 나와 울다가 하늘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다.

화제 속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아기장수에 관한 전설을 모티브로 한다. 주인공 홍길동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고 비범했던 아기장수였다. 그러나 솔거노비의 삶을 살던 부모는 죽임을 당할지 모를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아들의 괴력을 억제하려고 돌로 손을 내려 찧으려다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아기장수로 태어난 홍길동이 폭군 연산군을 뒤로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이처럼 설화 속 아기장수는 비록 결말은 슬프지만 민중의 구세주가 되어 등장한다.

현재에도 장수바위, 아기장수 무덤, 말무덤 등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어려서 억울하게 죽은 아기장수의 기상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기장수의 죽음 이후 용마가 나타나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 속에서 아기장수의 죽음이 안타깝고 부당하다는 민중 심리와 함께, 새로운 영웅 탄생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 있다.

말과 관련된 전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이야기는 치마대 전설. 주요 내용은 청년 장수가 자신의 명마가 빠른가, 자신이 쏜 화살이 더 빠른가를 시험하려다 실수로 말의 목을 베고 그것을 뉘우치며 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치마대 전설은 현재까지 20여 곳에서 채록돼 있다. 대표적으로 충청북도 진천의 김유신 장군 탄생지에 있는 치마대를 들 수 있다. 치마대에는 젊은 시절 김유신과 그의 애마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중 하나는 김유신의 애마가 술이 만취한 김유신을 등에 태우고, 늘 가던 화류계의 여인 천관녀의 집에 데려다 놓자, 술이 깨서 화가 난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화살과 말 중에 누가 빠른지 경주를 했는데 화살을 쏘고 달려와 보니 이미 나무에 화살이 있었던 것. 이에 화가 나 말의 목을 베었는데 그 찰나 다른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박혔다. 자세히 보니 김유신이 쏜 화살이었던 것.

고려 멸망과 조선왕조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 ‘육륭이 나르샤’에 등장하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는 신화적 인물. 그런데 이 두 영웅에게도 청년시절의 실수담인 치마대 전설이 전해진다. 치마대 전설에 등장하는 말(馬)은 하늘에서 내려준 용마라고 설명이 돼 있어, 대단히 뛰어난 말임을 강조하고 있다.

치마대 전설에서는 공통적으로 충직한 말의 억울한 죽음을 불러온 장수의 경솔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훌륭한 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성급함과 오판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이처럼 용마가 나왔다. 천마의 발자국이 있다. 아기장수가 나왔다 등등. 지역마다 신화적인 인물과 말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 아닐까.

출처 : 한국마사회